한(恨) 많은 "윈드서핑 Olympic 훈련장"
정상대
2019-12-05 (목) 22:03
5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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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 많은 "윈드서핑 Olympic 훈련장"
2020년 새해가 가까워 지고 있다 새해에는 Tokyo Olympic이 열린다. 이번 Tokyo Olympic 은 윈드서핑이 Olympic 메달을 딸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많은 Olympic 이다. 새해가 가까워지니 Olympic medal을 열망하든 제주훈련장이 떠오른다. 제주도 성산에 “윈드서핑 훈련장”이 하나 있었다. Olympic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하든 훈련장 이었다. 이 훈련장은 한국의 윈드서핑이 그 동안 Olympic 을 향한 “꿈과 한(恨)”이 맺혀져 있는 곳이었다. Olympic 을 향한 “꿈과 한(恨)” 우리나라 윈드서핑의 자존심은 대단했다. Olympic은 그냥 출전하는 것이 아니다. 예선전에서 티켓 출전권을 따야만 출전 할 수 있다. 예선전에서 한 번도 실퍠없이 티켓을 따서 Olympic 출전해온 우리나라의 유일한 종목이다. 물론 태권도도 있다. 그러나 태권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가대표선수들이 Olympic 입상의 꿈을 안고 눈물 흘리며 이곳에서 훈련을 하여 왔으나 40년 긴 세월 동안 아직 한 번도 입상을 해보지 못한 ‘무명가수의 슬픈 한’ 같은 것이 이곳 훈련장에 묻혀 있는 것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Olympic에 출전한 서용근 선수가 2007년에 운명 하였을 때 운구차를 이 훈련장 앞으로 모시고 왔다. 이 훈련장에서 "노재"를 지냈었다. 그때 선수들은 “고별사” 에서 그렇게도 기다리던 Olympic 입상을 보지도 못한 체 떠나가시는 걸 한탄했다. 남은 선수들이 기어코 입상을 하여 먼저 가시는 임의 영혼을 위로할 것이라고 맹세를 하였던 곳이다. 1982년 한국은 1988 Seoul Olympic 유치에 성공했다. Olympic 유치성공은 대한민국 국가의 엄청 큰 영광 이었다. Olympic 을 유치하고 나서 보니까 1984 Los Angeles Olympic 이 다가 왔다. 정부에서는 모든 종목에 대하여 무조건 LA Olympic에참가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요트 종목은 참가 할 수가 없었다. 출전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하필 윈드서핑만은 처음으로 개최 하여 출전권이 없어도 open으로 참가 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윈드서핑의 Olympic 연속 출전 그래서 우리나라 윈드서핑은 처음으로 1984년 첫 Olympic에 참가를 하게 되었다. 뚝섬에 살고 있든 조진섭 선수가 참가했다. 그 다음 Olympic은 1988 Seoul Olympic 이었다. 그때는 한국은 Olympic을 개최하는 주최국이기 때문에 티켓이 없이도 그냥 참가가 가능 하였다. 이한림 선수가 참가했다. 이로서 윈드서핑은 연속 두 번이라는 Olympic 연속 출전이 기록이 세워졌다. 그 다음 Olympic은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었다. 이때부터는 Olympic 티켓이 있어야만 했다. 출전권 티켓이 문제였다. 19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전권을 따는 예선전이 열렸다. 서용근 선수가 출전하였다. 거기서 용케도 출전권을 따 왔다. 예선전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따온 티켓이었다. 우리나라 윈드서핑은 Olympic 연속 3회 출전 이라는 기록이 세워졌다. 연속 3회 출전을 하고 나니 보니까 뭔가는 남모르는 자존심이 생겼다. 이제 선수들이 바다에서 마음 놓고 훈련할 수 있는 그런 ‘훈련장’이 하나 있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윈드서핑의 Olympic 훈련장 설립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하는 분위기 였다. 초창기 당시 윈드서핑 관계 협회는 3개의 협회가 있었다. 한국보드세일링협회가 있었고 생활체육윈드서핑협회가 있었고 또 사단법인 대한윈드서핑협회라는 것이 있었다. 한국보드세일링협회와 생활체육협회는 국가의 체육협회 였다. 반면 대한윈드서핑협회는 당시 (주) 쌍방울이 주체가 된 임의단체로 사단법인 형태였다. 두 협회의 상위 단체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단법인 협회가 주체가 되어 회원들의 성금을 모아 성산포에 훈련장을 마련하였다. 윈드서핑 “Olympic 훈련장”이라고 하였다. 훈련장은 Olympic 출전 선수들의 주로 사용하였지만 간혹 육지에서 내려온 동호인들도 와서 묵기도 하였다. 그래서 윈드서핑의 “사랑방”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위의 사진은 제주훈련장 모습이다. 윈드서핑 타는 사람들의 분열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2007년 이 지역이 제주도의 해양레저지역으로 지정되고 개발이 되기 시작하면서 철거해야 할 운명이 되었다. 어느 날 보광이라는 회사가 제주법원에 강제철거명령신청을 하여 철거한다는 제주지방법원의 “붉은 딱지”가 붙혀젔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30여 년 동안 지금까지 훈련장으로 사용 해온 연고권은 있다. 더구나 그것도 개인이 아니고 Olympic에 나가는 국가대표 선수들의 훈련장이다. 다른 곳에 훈련장이라도 하나 마련해주면 몰라도 그냥 빈손으로 철거만 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붉은 딱지 붙여졌으니 빨리 소송을 해보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당시 윈드서핑 3개 단체가 힘을 모아 같이 소송을 하기로 하였다. 30년 사용해온 연고권이 있고 또 우리가 현재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는 뭔가는 가능성은 보였다. 우선 철거 할 수 없다고 소송을 내기로 하였다. 만약 철거가 불갈피할 경우 다른 곳에 훈련장을 하나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시점에서 윈드서핑 타는 사람들이 단합이 되지못하고 분열이 되고 말았다. 당시 윈드서핑 3개 단체 중 생활체육협회는 소송에 참여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애통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눈물이 나는 그런 분열이 생긴 것이다. 훈련장이 철거되는 위기가 닥쳐왔는데 윈드서핑 이 분열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슬픈 상황이 벌어 졌다. 윈드서핑 역사의 한 오점을 남겼다고 하였다. 울고 싶다는 친구까지 있었다. 그러나 상항는 다급하기만 하였다.. 어쩔수 없이 대한윈드서핑협회와 한국윈드서핑협회 2개의 협회만으로 우선 강제철저 중지신청을 제주법원에 내기로 하였다. 30년 동안 사용해온 연고권을 주장하였다. 제판과정 에서 흐느낌도 있었다. 안두옥씨는 제판장으로 부터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 결국엔 불행하게도 제주 법원은 우리의 주장을 받아 주지 아니하였다. 소송이 패소되었다. 이의가 있으면 항소를 하라고 하였다. 항소조건으로 4천만 원의 공탁금을 공탁하도록 하였다. 이제 급히 공탁금 4천만 원의 공탁금을 마련하여 제주법원에 항소를 하여야할 그런 입장이 되었다. 당시 윈드서핑 3개 단체가 분열되어 있어 니까 공탁금 4천만 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공탁금이 없어 항소를 할 수가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져 갔다. 결국 4천만 원을 마련할 수 없어 항소를 하질 못했다. 항소기일 2주일이 지나자 페소가 확정되고 말았다. 함께 사라져간 Olympic "꿈과 한" 중장비들이 훈련장에 닥쳤다. “포크레인”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포크레인으로 “윈드서핑 훈련장”을 부스고 있었다. Olympic의 꿈과 한이 담긴 대한민국 “윈드서핑 제주훈련장”이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 후 제주도 도청에 새로운 훈련장을 따로 하나 마련해 달라고 요청하자는 의견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윈드서퍼들이 분열된 상태에서 그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작아져 갔다. 끝내 그 소리마저 사라져 버리고 더 들리지 아니 하였다. 그때 ‘운구차’를 이곳 훈련장 까지 끌고 와 시신 앞에서 남은 사람들이 기어코 Olympic 메달을 따서 임의 영혼을 위로하겠다는 그 맹서도 잊혀져 가는듯 해지고 있다. 입상을 하여 영혼이나마 달레 주려고 하였는데 이제 훈련장 자체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아쉬움만 남았다. 제판부에 개별적으로 제출된 탄원서도 여러 개 있었다. 88 Olympic 국가대표로 출전한바 있는 이한림선수 와 제주협회장이었든 김기윤 교수도 탄원서를 제판부에 제출한 바 있다. 내용은 http://blog.daum.net/kwsa8688/157544 에서 볼 수 있다.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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